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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이 아름다웠던 순간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2025년 8월 12일,
우리 곁에 늘 함께 해 온 기독교의 이야기가
여러분 앞에 펼쳐집니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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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순간들(7) : 선교 150주년, 더 이상 넘어야 할 벽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여정
갤러리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7): 2034년 한국 기독교 선교 150주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새 세상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벽이 없는 사회로 그렸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교회는 새 세상의 출발점이었고, 세계로 확산되면서 장벽들을 허물었다. 물론 그 일은 쉽지 않았고, 속히 이뤄지지도 않았다. 때로는 교회가 장벽이 되었다. 기독교가 처음 넘어야 할 장벽은 인종 차별이었다. 세상은 다양성으로 가득차 있고, 따라서 근본적으로 구별이 존재한다. 문제는 구별이 차별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유대인의 민족주의를 넘어 모든 인종의 보편주의를 지향하여, 세계종교가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항상 특정 민족주의와 손잡으려는 유혹을 받아, 국수주의적 종교로 전락하곤 했다. 기독교 앞에 놓인 두 번째 장벽은 계급 차별이었다. 인간을 상하 관계로 나누려는 시도는 역사상 신분, 계급, 계층 등 명칭을 달리하면서도 지속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 전 마지막 교훈에서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5).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원수를 이웃으로 바꾸고, 상하 관계를 친구 관계로 바꾸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선지 기독교 역사에 ‘우정’을 내세운 운동이 많고, ‘친우회’(Society of Friends, 퀘이커교)라는 교파도 있다. 세 번째 큰 장벽은 성별 차별이었다. 역사상 여성을 백안시하는 가부장주의가 완강하게 이어졌다. 여성은 아예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거나 ‘아녀자’라는 통칭을 통해 아동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다. 근현대에 등장한 여성주의의 역사는 성별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으려는 후발주자의 치열한 노력으로 점철되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세상에는 인종, 계급, 성별 등 잘 알려진 장벽도 있지만, 이밖에도 장벽들이 넘쳐난다. 아동과 성년 간의 연령 차별(최근에는 노년 차별), 제1세계와 제3세계 간의 국력 차별(최근에는 정치적 발언권을 갖지 못한 비주류 종족을 가리키는 제4세계 차별),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장애 차별,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직분 차별(최근에는 비전문인 차별), 토착인과 이주민 간의 이주 차별(최근에는 북한이탈주민 차별, 아시아인이 다수를 이루는 신한국인 차별) 등 다양하다. 장벽은 담을 가리키는 ‘장’(墻)과 벽을 가리키는 ‘벽’(壁)의 합성어이다. ‘벽’이라는 단어만으로도 ‘가로막음’이란 의미를 나타낼 수 있지만, ‘장벽’이란 합성어는 의미를 배가한다. ‘장’의 훈과 음은 우리말 ‘담’을 사용한 ‘담 장’이고, ‘벽’의 훈과 음은 한자어 ‘벽’을 사용한 ‘벽 벽’이다. 벽의 훈과 음에 벽이란 단어가 중복된 것을 보면, 벽을 가리키는 우리말은 원래 없던지 잊혀진 듯하다. 언어에 따라, 담과 벽을 구분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여하튼 담이 개방적 특성이 좀더 강하다면, 벽은 폐쇄적 특성이 좀더 강하다. 장벽 없는 세상을 향한 길에는 부수지 않고 넘을 수 있는 담도 있지만 반드시 뚫고 부셔야 하는 벽도 있다. 따라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나설 필요가 있다. 작년과 올해는 선교 140주년을 기념했다. 10년 후면 선교 150주년이다. 그때가 되면, 사회의 장벽이 더 많이 무너져 내렸을까?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은 장벽 없는 사회를 지향한다. 그런 구체적인 노력의 첫걸음으로, 건물에 장애인을 환영하는 마음을 담고자 무장애(베리어프리, barrier-free) 설계로 건축했다. 우리 역사문화관과 더불어, 관람객, 한국교회, 나아가 한국 사회가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헐고 대신 다리를 놓는 일에 함께 나서는 꿈을 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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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순간들(6) :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갤러리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6): 1988년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 한국의 소원은, 가장 큰 소원은, 과연 무엇일까? 제목이 아예 ‘우리의 소원’이란 노래가 있다. 바로 통일에 대한 노래이다. 부자지간인 안석주, 안병원이 작사하고 작곡한 동요로,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어린이시간에 발표된 곡이다. 귀엽고 예쁘기만 한 동요인데, 이 동요가 노래하는 소원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았고, 그 소원을 이루려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그래서 동요를 부르는데, 비장감이 든다. 그리 길지 않은 가사라서, 전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을 이루자, 이 겨레 살리는 통일, 이 나라 살리는 통일, 통일이여 어서 오라 통일이여 오라.”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핵심을 알차게 담은 ‘동요 통일론’이다. (동요통일론: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를 통해 통일의 염원을 표현하고 미래 세대에게 통일 인식을 함양하려는 활동이나 관점) 극적인 해방은 민족의 소원을 반만 들어줬다. 독립했지만, 독립을 잃기 전의 모습은 두 동강이 났다. 그때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다. 하나였다가 둘로 나뉘었기에, 다시 하나가 되려는 통일을 가로막는 분단의 벽을 넘는 일은 따지고 말고 할 게 없다. 이 일은 소원이라기보다 민족의 명령이다. 분단을 넘어 통일로 나가려는 노력은 분단 직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길은 가시밭길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통일의 우선적인 당사자로 나선 정부는 통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경우가 많으면서도 민간 참여를 막고 독점하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최근까지 7개의 주요남북합의서와 기타 성명서 등을 냈다. 주요남북합의서로는 7.4남북공동성명(1972),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 1991),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1992), 6.15남북공동선언(2000),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 2007),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판문점선언, 2018), 평양공동선언(2018)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첫번째 합의서인 7.4남북공동성명은 통일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을 천명했다. 한편 교회도 다양한 의견을 냈다. 대표적인 것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이다.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국교회의 수년 간의 통일을 위한 노력과 생각을 집대성하여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기존의 통일 3대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2가지 원칙을 추가했다. 곧 ‘인도주의,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인 참여 곧 민간 참여’이다. 인도주의와 민간 참여는 이후 정부의 통일 정책에 반영되었다. 88선언은 기독교적 통일론의 관점에서 남북한 정부에 여러 제안을 건넸다. 분단으로 인한 상처의 치유, 분단극복을 위한 국민의 참여 증진, 사상.이념.제도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 남북한 긴장완화와 평화증진, 민족 자주성의 실현 등을 위한 구체적인 제안들이었다. 이것은 국내외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막상 국내에서는 분단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었음을 회개하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반응도 이해가 되지만, 분단 극복과 통일 실현은 대속적 고난이 없이는 이뤄지기 어려운 일이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 곧 죄인을 위해 의인이 죽는 십자가 정신이 필요하다. 세상의 용서 개념은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는 쉽지만, 실제로 이뤄지기는 어렵다. 다른 말로 ‘사법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적 용서 개념은 잘못의 피해를 입은 사람이 용서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해는 어렵지만, 실제로 이뤄지기는 오히려 쉽다. 다른 말로 요즘 각광받기 시작한 ‘회복적 정의’라고 할 수 있다. 부디 이런 방식의 화해가 기독교인부터 시작하여 널리 퍼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통일이 조금이라도 빨리 오기를, 통일이 늦어진다면 평화라도 정착되기를. 이뤄지기 어려운 소망이기에, 순수한 소년소녀의 마음으로 다시 불러본다. ‘통일이여 오라.’ 남북은 원수가 되기 전에는 형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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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순간들(5) : 믿음도 하나이니 성경도 하나라고?
갤러리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5): 1970년 가톨릭과 함께 한 공동번역성서 간행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고, 복음은 성경을 통해 전해진다. 그래서 선교는 성경 번역을 우선적인 사역으로 삼는다. 성경이 각 나라의 말로 번역되고, 각 나라 사람이 모국어 성경을 읽을 때, 그들은 비로소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한국교회의 성경 사랑은 유별나다. 먼저 선교사는 쇄국정책으로 인해 한국에 들어올 수 없자, 국경 밖에서라도 성경을 번역했다. 로스 선교사는 만주에서 특별히 국경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서상륜 등 한국인을 만나 한글을 익히고 성경을 함께 번역했다.드디어 1882년에 누가복음 쪽복음(단권 복음)인 『예수성교누가복음전서』를 출간했고, 1887년에는 신약 전체를 담은 『예수성교전서』를 출간했다. 그런데 한국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수정은 예수를 믿자마자 성경 번역에 나서, 1885년 마가복음 쪽복음인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를 출간했다. 때마침 일본을 거쳐 한국에 입국하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가지고 들어온 성경이 바로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였다. 선교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개국으로 인해 외국인 입국이 가능해지자, 선교사는 1884년부터 속속 입국했다. 입국이 시작된 지 3년 만에 만주에서 신약전서가 출간되던 해인 1887년에 벌써 성경번역을 위한 위원회를 결성했다. 1911년 국내 번역본으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담은 『성경전서』가 출간되어 공인본이 되고, 먼저 만들어진 로스본과 이수정본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한국 개신교는 하나의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천주교는 주로 교리와 신앙생활에 관한 신앙 서적을 출간하고 이를 위해서 발췌한 성경을 번역하다가, 1941년에 신약전서를 출간했다. 그 결과 1940년대부터 개신교와 천주교가 각각의 성경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세계적으로 교회 일치와 연합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한국의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가 출간되었다. 1971년에는 신약전서가, 1977년에는 성경전서가 출간되었다. 한국의 신구교 모든 교회가 하나의 성경을 갖게 되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편 분단과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줄 알았던 북한교회가 1970년대부터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교회 건축, 신학교 설립, 성경 및 찬송가 출간 등 일련의 작업이 뒤따랐다. 1983년에는 신약전서, 1984년에는 구약전서가 각각 출간되었고, 2010년에는 『문화어 성경』(문화어:북한 표준어)이 출간되었다. 1980년대 출간된 성경을 분석해 보니, 남한의 『공동번역 성서』을 저본으로 하여 북한의 표준어에 맞춰 개정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성경 번역과 개정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작업인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걸까? 성경 번역 전문가인 민영진 박사가 이 문제를 궁금해하다가 북한교회 지도자로부터 그 해답을 얻었다. “공동번역 성서 평양 교정본을 작업한 실무자가 다름 아닌, 이눌서 선교사의 비서였던 이영태 씨라는 것이다.”([민영진 칼럼], “『북한성경』 제작 실무자”, 「새가정」) 이눌서(레이놀즈) 선교사는 한글성경 번역에 헌신한 자였고, 이영태는 개국 이전에 한국에 와서 성경을 나눠주려다가 목숨을 잃은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성경을 받은 이의 후손이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공동번역 성서』는 한국에서 개신교와 천주교가 하나의 성경을 갖게 해주더니, 남한교회와 북한교회가 하나의 성경을 갖는 계기도 마련했다. 장차 통일이 되면, 우리는 어떤 성경을 가지게 될까? 과연 통일 한국의 모든 교회가 하나의 성경을 가질 수 있을까? 지금부터 ‘통일 성서’를 준비해 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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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순간들(4) :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무려 70년 만에 첫 번째 한국인 여성 목사가 세워졌다고?
갤러리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4): 1955년 첫 여성 목사 안수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때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입국한 1885년을 기준 삼더라도, 첫 번째 한국인 여성 목사가 세워진 것은 무려 70년 만이었다. 1955년 감리교회(기독교대한감리회)에서 전밀라, 명화용이 목사 안수를 받아 최초의 한국인 여성 목사가 됐다. 그 이후 꼭 70년 세월이 흘렀다. 70년은 성경에서 상징적 숫자인데, 한국인 여성 목사 안수와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 번째 70년(1885-1955)은 여성 목사 안수를 향한 지난한 개척의 길이었고, 두 번째 70년(1955-2025)은 그런 결정을 구현하려는 험준한 여정이었다. 이미 2000년 전에 성경은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라는 폭탄선언을 했다. 인종과 계급과 성별의 차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성명서였다. 이런 정신에 따라, 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선한 일에 앞장서 왔다. 특히 한국에서는 개혁의 아이콘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항상 선한 일에 지혜롭거나 용기를 보이지는 못했다. 때로는 교회가 세상을 선도하기보다 세상에 압도됐고, 그로 말미암아 분쟁과 갈등 속에서 지리멸렬했다. 그래서 교회의 개혁은 더디고 부분적으로 성취됐다. 여성 목사 안수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의 여성 목사 안수는 남녀 차별을 극복하려는 교회의 전반적 사역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성 목사 안수가 이뤄지기 전까지 다양한 여성 해방 운동이 진행됐다. 첫째, 여성의 개별적 정체성을 인정하려고 했다. 선교지 여성은 이름도 지위도 공적 역할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적 인격체가 됐다. 특히 근현대서구선교운동 말기에 서구여성운동이 시작됐다. 여성 선교사는 공식적 기독교 사역자인 동시에 독립적여성 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성 선교사는 여성교육을 통해서 여성의 입지를 넓혔다. 둘째, 여성의 정당한 지위를 확보하려고 했다. 특히 여성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은 한국인 여성 의사 배출을 위해 애썼다. 그런데 개혁 세력을 자처했던 선교계가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선교지에 여성 의료선교사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에서는 ‘남성-의사, 여성-간호사’라는 남녀 차별적 구조를 적용했다. 그 결과 여성 의료교육(조선여자의학강습소, 1928년 설립)은 선교부 사역이 아닌 선교사 개인 사역이 됐고, 이후 한국인이 운영하는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거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기독교 선교사역이 민족사학의 일부가 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셋째, 여성의 대표성을 확보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 목사 안수이다. 성직자주의는 타파해야 하지만 성직자가 교회의 중심축을 이룬다는 점에서, 여성 목사 안수는 교회 정상화의 관건이다. 왜냐하면 안수를 받아야 교회의 교리(가르치는 사역)와 정치(다스리는 사역)에 공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목사 안수가 현실이 되기까지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쳤다. 1930년 감리교회가 설립되면서 여성 안수를 결정했는데, 미국 감리교회보다 9년이나 앞선 결정이었다. 다만 한국인이 아닌 여성 선교사에게 국한됐다. 1951년 예수교재건교회에서 최덕지가 명예 목사로 추대됐고, 1955년 5월 4일 목사 안수를 받아 안수 목사가 됐다. 이때 김영숙, 소갑숙이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이후 여성 목사 안수가 중단됐다. 1955년 3월 13일 감리교회에서 전밀라, 명화용이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이후 20세기 후반에 한국기독교장로회(1956 장로 안수; 1977 목사 안수),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1996 목사, 장로 안수),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1997 목사 안수), 21세기에 대한성공회(2001 사제 안수), 기독교대한성결교회(2005년 목사 안수),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2012년 목사 안수) 등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각 교단이 이 과정에서 단서 조항을 붙이는 등 소극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고 여전히 많은 교단에서 여성 안수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교회가 사회보다 뒤진다면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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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순간들(3)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6.25전쟁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갤러리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3):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창설 1924년 9월 24일 새문안교회에서 한국교회, 선교부, 기독교 기관 등이 모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당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결성했다. 이로써 한국 교회일치운동이 본 궤도에 들어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선교사 입국 이래 진행되어 온 국내 교회일치운동을 집대성하는 한편, 국제선교협의회의 일원이 됨으로써 세계 교회일치운동과도 관계를 맺었다. 교회일치운동은 영어로 에큐메니칼운동이라고 하는데,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란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사는 ‘온 세상’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온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를 의미한다. 그래서 교회일치운동은 세상 사람들이 하나 되는 것과 다양한 교파가 하나 되는 것을 추구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한다(요 3:16). 이에 따라, 교회일치운동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세상을 사랑하시는 일에 동참했다. 한마디로 교회일치운동은 하나님의 ‘교회 사랑’과 ‘세상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한국교회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 대해 여러모로 사랑을 나타냈다.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일찍부터 한국 사회의 약자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대한민국을 6.25전쟁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먼저 1932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당시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는 ‘사회신조 초안’을 발표하면서 서문과 더불어 12개의 행동강령을 소개하는 가운데, 제11조에 “최저임금법, 소작법, 사회보험법의 제정”을 언급한 바 있다. 이미 백 년 전쯤 한국 사회의 경제적 벽을 넘는 최소한의 장치라고 할 수 있는 최저임금이 다뤄졌다. 이어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3년 ‘인권선언’에서도 노동자의 인권 항목에서 “최저임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를 확립”할 것에 대해 언급했다. 이런 기본적인 문제가 오늘날에도 논란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아쉬울 따름이다. 한편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인하여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발발 직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당시 한국기독교연합회)는 미국 교회, 선교 단체, 국제선교협의회 미국 사무국 등 미국 교계에 긴급 타전하여 국가 비상사태를 알렸다. 한국의 전쟁 위기는 즉각 미국 교계의 관심을 받았고, 미국 교계를 필두로 한 전 세계 교회가 전쟁 구호와 전후 복구에 적극 나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전쟁 구호와 전후 복구 사역의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전쟁 발발 직후 유엔(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가 6.25전쟁을 의제로 다뤘는데, 마침 휴가 중인 미국 대표를 대신하여 미국 부대표요 교회일치운동 운동가였던 인물이 주도하여 유엔군 참전 결의를 이끌어냈다. 얼마 뒤인 7월에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회는 캐나다 토론토 회의에서 ‘한국 상황과 세계 질서’라는 성명서를 통해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고 이를 퇴치할 경찰 행위(방어적 군사행동)를 지지하는 한편 타협과 조정을 통한 해결책도 추천했다. 이때 세계교회협의회가 인도적 결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 입장을 견지하지 않고 반공적 결정을 했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불과 1년 뒤인 1951년 6.25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평화를 위해 휴전을 추진했는데, 세계교회협의회도 이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이번에는 용공 단체로 몰렸고, 이런 음모론은 오늘날도 회자된다. 이는 어처구니 없는 모함을 넘어 배은망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종전 이후 분단의 벽을 넘으려는 평화와 통일운동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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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의 순간들(2) : 3.1운동 직후 감옥이 부흥운동 현장이 되었다고?
갤러리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2): 1919년 종교 연대로 이룬 3.1운동 한국교회는 1919년 3.1운동에 동참하면서 교회와 민족 간의 장벽을 넘어섰다. 기독교는 3.1운동에서 민족 수난의 십자가를 지면서, 참신한 외래종교의 차원을 넘어 당당한 민족종교로 전환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대표적인 민족운동인 3.1운동에 어떻게 동참했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교회의 3.1운동 참여는 세 가지 특징을 보였다. 첫째, 3.1운동은 종교운동이었다. 3.1운동은 신흥종교인 천도교와 기독교, 그리고 전통종교인 불교 가운데 혁신계가 참여했다. 세 집단 모두 민족의 과거보다 미래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천도교는 동학의 후예로서 민족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3.1운동을 선도했다. 기독교는 천도교와 연대하면서 민족 정치를 위한 종교 연대의 전통을 낳았고, 전국조직망을 통해 3.1운동을 실제적으로 담당하는 주축이 되었다. 불교 혁신계는 비록 세력이 크지 못해 실질적인 영향력은 미약했지만, 전통종교의 정치적 사명을 상기시키는 상징적 역할을 했다. 한 마디로 3.1운동은 종교의 사회 통합 기능과 사회 개혁 기능 중에서, 사회 개혁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일대 쾌거였다. 둘째, 3.1운동은 신앙운동이었다. 한국교회는 천도교도 공감하는 비폭력저항정신이 3.1운동 정신의 핵심이 되도록 천명했고, 운동 전개 과정에서 실제로 구현했다. 본 역사문화관 상설전시장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교회는 ‘독립단 통고문’을 통해, 3.1운동을 비폭력저항운동으로 전개할 때 기도와 성경읽기를 병행하도록 지침을 주었다. 심지어 교인들이 감옥에 갇혀서도 기도와 찬송을 그치지 않자, 이를 본 게일 선교사가 한국교인은 감옥을 부흥운동 현장으로 만들었다고 증언했다. 셋째, 3.1운동은 애국운동이었다. 진정한 나라사랑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나라사랑을 위해 감당한 고난이야말로 명백한 증거인 셈이다. 한국교회는 민족 수난의 십자가를 지는 제자도의 모습을 보였다. 한국교회는 대표적인 현장세력으로서, 당시 총인구 대비 교인 비율은 극히 낮았지만, 수난자 가운데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높았다. 심지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총회장이 수감되었고, 총회장으로 한국인 대신 사무엘 마펫 선교사를 뽑아야 했다. 선교사와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설립했던 전국의 기독교 학교들은 국권침탈 이후에도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3.1운동때 각 지역의 운동 거점으로 활약하였다. 그 결과 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소요 사태’에서 요주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조선소요사건공로자조사철’을 보면 일본식민정부 학무국이 학생들의 3.1운동 참여를 적극 막았던 사람들을 포상하기 위한 명부(조선소요사건의상인명부朝鮮騷擾事件擬賞人名簿)와 관련 조사 서류가 수록되어 있다. 그만큼 3.1운동은 학생을 비롯한 전국민의 운동, 특히 교육선교에 앞장섰던 한국교회의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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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 명지전문대학X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지역사회 협력기여를 위한 협약식
갤러리 -
한국 기독교의 순간들(1) : 분열로 유명한 한국교회가 하나가 될 뻔했다고?
갤러리벽 너머의 벽 Wall Beyond Wall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막힌 벽을 넘고자 했던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순간들(1): 1905년 교파 구별 없는 독립적인 단일교회 '대한예수교회' 설립 논의 20세기 초에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의 마음이 크게 움직였던 적이 두 번 있다. 하나는 1903년 원산에서 하디(R. Hardy) 선교사를 중심으로 선교사 회개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운동은 마치 들불처럼 번졌고, 한국교회가 대거 호응하면서 마침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정점으로 한 대부흥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영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부흥에 대한 열망은 한국교회의 특성이 되었고, 2007년 ‘다시 1907년’이란 구호로 재연된 바 있다. 다른 하나는 1905년 일단의 선교사가 교회 일치운동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의기투합하여 선교사 연합기구 형성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재한복음주의선교사통합공의회’가 결성되었다. 이 연합기구는 선교사역 연합은 물론이고 한국 개신교의 초교파 단일 교회를 세우려는 계획까지 추진했고, ‘대한예수교회’라고 교회명까지 미리 정해 놓았다. 그러나 결국 교회 일치운동의 꿈은 선교사역 연합 수준에 그쳤고 단일 교회 설립은 불발되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런 단일 교회 설립의 좌절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이유를 찾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선교사 보고서 등 관련 사료를 살펴보면, 당시 선교사역 연합의 분위기도 완전히 무르익지 못한 터라, 단일 교회 설립의 여건은 성숙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대신 선교사들은 몇 가지 의미 깊은 일을 했다. <한국선교평론>(Korea Mission Field)라는 연합 잡지를 40년 가까이 펴내기 시작했다. 이 잡지는 선교와 교회 역사 이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결정적인 사료로, 원본이 본 역사문화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가능한 범위에서 교육, 의료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역을 연합 사역으로 전환했다. 또한 단일 교회 설립 대신 선교 지역 분할 협정인 ‘선교예양’(comity)을 공식화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비록 단일 교회 자체는 설립되지 않았지만, 단일 교회를 위해 마련했던 교회명은 남았다는 사실이다. 가령 첫 번째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단명은 ‘대한예수교회’라는 단일 교회의 교회명을 그대로 두고, 거기에 교파명을 추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즉 대한(국가명)+예수교회(종교명)+장로회(교파명)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장로교’ 대신 ‘장로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한국에 예수교회라는 단일 교회가 있고(비록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그 안에 장로교라는 집단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표현이다. 이런 교단명의 구조는 이후에 한국교회의 교단명의 기본 패턴이 되었다. 물론 국가명, 종교명, 교파명의 순서가 달라지기도 하고, 예수교 대신 기독교가 사용되기도 했다. 가령 기독교조선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등을 들 수 있다. 간혹 이런 전통을 몰라서 교파명에 ‘회’대신 ‘교’나 ‘교회’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교인의 반응은 어땠을까? 물론 한국교인은 이 일을 적극 환영했다. 단일 교회 설립이 좌절되자 낙심했지만, 연합 정신을 다양하게 발휘했다. 첫째, 선교사들이 선교예양을 도입하면서 기존 교회들을 지역에 따라 타교파로 옮겨야 할 때 걱정했지만, 한국교인은 크게 괘념하지 않았다. 둘째, 한국교인은 스스로 단일 교회 설립의 꿈을 표명했다. 셋째, 한국교인은 1918년 ‘조선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와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오늘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가 조직된 후로 교회 일치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했다. 연합 교회는 없지만 연합 정신은 도도히 이어져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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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스케치]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개관식
갤러리2025년 8월 12일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개관식이 있었습니다. 축하해주시기 위해 많은 분들께서 함께 해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축하와 응원 보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문화공간입니다. 언제나 찾아오셔서 준비한 전시와 교육, 기독교 아카이브와 문화 행사들을 마음껏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에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서오세요.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입니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유튜브 : [현장스케지]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개관식☜ 클릭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위 치 : 서울 은평구 진관1로 94 ○ 전 화: 02-356-8414~6 ○ 이메일: info@kcmuse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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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가 한국에 돌아온 ssul (안교성)
갤러리선교가 ‘가라’라는 동사로 시작되었다면, 어떤 동사로 끝이 나야 할까? 근현대 서구의 선교운동은 세월이 흐르면서 두 가지 질문에 직면했다. 첫째는 ‘언제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초창기 선교사는 대개 평생 사역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머무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선교사가 오래 머물다 보니, 현지교회가 선교사 철수를 요구하는 ‘선교 유예’(missionary moratorium) 주장까지 나왔다. 물론 선교사가 필요없다는 이 ‘선교 유예’의 입장은 대세의 흐름이 되지는 않았다. 둘째는 선교사를 ‘계속 보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선교지 상황이 달라지면서, 선교사나 선교사역에 대한 요구도 달라졌다. 20세기 전반에는 ‘새로운 선교사’라는 주제가 대두되었다. 새로운 선교사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모습을 보였고, 현지교회의 선교 전문성을 심화하거나 아예 새로운 분야를 여는 마중물의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도 1920년대부터 선교사 철수나 새로운 선교사 등의 주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한 선교사는 이런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준비하지 않다가,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에 의해 갑자기 추방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해방 후 한국에 선교사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의 종말을 가져온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세계적으로는 선교가 제국주의 배경에서 이뤄졌다는 이유로 선교사의 귀환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선교지에 대한 애착도 컸고 선교 사역도 갑작스럽게 중단되었기에, 기존 선교사가 속속 귀환했고, 새로운 선교사도 계속 들어왔다. 선교사는 해방 후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국가적으로는 통역과 고문 등으로 국가 재건에 기여했다. 더구나 정부수립 직후 6.25전쟁이 벌어지자, 전쟁 구호와 전후 복구에 힘썼고, 심지어 참전하여 국가 수호에 기여했다. 교회적으로는 교회 재건에 앞장섰다. 또한 교회, 병원, 학교 등 전통 영역의 범위를 넘어, 문맹퇴치, 가정 사역, 여성 사역, 아동 선교, 방송 선교 등 새로운 영역에 나섰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내면화하도록 성경연구, 묵상 운동도 소개했다. 학원 선교를 도입한 결과, 전도훈련운동이 전국복음화운동의 흐름 속에서 시작됐고, 교회에서는 제자훈련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이런 훈련들은 한국교회가 세계선교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일에도 도움을 주었다. 사회적으로는 한국교회의 산업화와 민주화에 기여했다. 산업전도에서 산업선교로 진화한 노동 선교에 선두적인 역할을 했고, 도시빈민 문제 등 산업화의 어두운 면에 눈길을 돌리게 했고, 무엇보다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고난받는 한국인의 친구요 증인이요 함께 고난받는 자가 되었으며 때로는 이로 인해 추방도 당했다. 흥미롭게도 최근에는 서구인이 아니라 해외 동포가 선교사로 한국에 오고 있다. 한국인은 국내외에서 선교 열정을 지닌 민족으로 이제는 오히려 조국에도 선교사로 돌아오고 있다. 시대에 따라 선교사 유형은 달라지지만, 계속되는 것이 있다. 바로 선교사가 현지교회의 일원이 되어, 세계 교회가 하나라는 교회일치운동의 상징이 되는 일이다.